거주지인 수원에서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까지 14박 15일간 국토대장정을 다녀왔다.
계기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 그리고 걸으면서 만나는 분들은 항상 이런 말을 묻곤 했다.
왜 가시는거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내가 여행을 좋아할 뿐
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느냐만,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방 기숙사 친구들끼리 방학마다 여행을 가곤 했고
졸업을 하고서는 같이 일본을 갔다왔다.
입대하기 전에는 갑자기 유럽에 가고 싶어서, 휴학계를 내고 반년동안 알바를 해 돈을 모아 31일 동안 배낭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그래서 국토대장정도 여러 도시들을 걸어서 여행하는, 처음으로 혼자 여행해보는 경험 정도로 생각해 다소 급작스럽게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발하고 바뀐 목적
준비를 마치고 처음 걷는 날 '그냥 여행' 보다는 많은 것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다른 여행처럼 휴식에 가깝지 않았고 도전
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 경험으로 더 많은 것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걸으면서 생각한 국토대장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나와의 대화
나는 한정수 님의 글을 좋아해 가끔 읽곤 하는데, 거기서 나와의 대화
라는 것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나와 대화한 시간이 있었나?' 싶었다.
인간적으로 '그냥 남들이 좋아하니까' 내가 좋아하지 않았나 싶은 부분들과 개발자라는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해 '그냥 지금까지 해온 거니까', '밥벌이로 할 수 있는 기술 중에 제일 잘하는 거니까'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길고 긴 도로1에서 나외의 대화
를 많이 하고, 그 중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
만큼은 알아가자고 다짐했다.
걷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평소에 약속 시간에 일찍 도착했다면 버스 정류장 한 두개 정도는 먼저 내려서 걷기도 하고
막차가 끊기는 (그나마 가까운 지역인) 상황에서는 걸어서 집에 가기도 했을 정도로
걷는 것에 부담이 없었고, 과정을 즐거워했다.
그래서 국토대장정을 가기로 했을 때 걱정이 크진 않았다.
그렇게 첫 날을 매우 쉽게 걸었고 앞으로도 쉬울 줄 알았다.
근데 그건 크나큰 오산이였다. (첫 날 도착지는 오산이였다)
피로의 누적
첫 날 21km, 그 다음 날도 21km로 똑같이 힘들 줄 알았는데 나는 피로가 누적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몸은 더 무겁게 느껴져 속도가 더뎌지고 쉬는 시간까지의 텀이 짧아졌다.
걷는 길의 중요성
내가 좋아하곤 했던 길은 안전했다.
근데 국토대장정에서 걷는 길의 90%는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1. 눈이 쌓여 있었다.
국토대장정을 떠나기 전 주에 눈이 3번 왔었다.
많이 녹길 바랬지만 녹다가 얼은 눈이 대부분이였고, 걷다가 눈이 오고 비가 오는 날도 있었기에
미끄러워 위험하고 추위에 노출되었다.
2. 차도
국토대장정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은 점인데, 걷는 길이 대부분 차도의 갓길이였던 것이다.
갓길이 조금 넓으면 다행인데 50%의 길은 어깨와 차가 10cm 간격도 안되는 거리를 스쳐갔다.
거기에 더해 국도로 다니는 대부분의 차는 트럭 혹은 덤프 트럭과 같은 대형 차종이였다.
거기에 또 더해 갓길에는 쌓인 눈이 많아 잘못하고 넘어지면 ... 상상하기 싫었다.
동료
그렇게 손에 식은 땀이 나는 상황을 견뎌가며 3일차까지 걸었을 때 동료가 생겼다.
고등학교 때 같이 여행다니던 친구였는데, 대구를 목표로 합류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친구가 3일차에 수혈? 되지 않았다면 끝까지 걸을 수 있었을까 싶다.
마의 3일차
국토대장정을 하는 사람들 중 가장 많이 포기한다는 일차가 3일차라고 한다.
군대에서 이등병에서 일병으로 진급할 때 정도로 생각되어 가장 많이 포기하는듯 싶은데, 나도 이 동료가 없었으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지도 모르겠다.
몸은 피곤하고 앞으로는 더 힘든 길이 남았으니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는데, 동료가 생겨 다시금 즐거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부상
나는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산소는 안했지만) 걷는 것을 통해 부상을 입을 줄 상상도 못했는데
이번에도 내 예상은 처참히 빗나갔었다.
염증
5일차에 거의 다 도착해서 걸을 때 발등이 아파왔고, 단순 근육통이라 생각해 파스를 붙이고 잣는데
자고 일어나서도 아파왔다.
먼저 국토대장정을 해본 지인이 말씀해 주시길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서 진압을 해야한다 해주셨고, 나도 동의해 아침에 여는 병원에 갔었는데
염증이 생긴 것 같다는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진통제와 함께 약을 처방 받고 전기 침과 물리치료를 받으니 일부 호전되긴 했었어서 마저 그리고 계속 걸었다.
근육 파열
몸이 적응한다는 7일차 이후로는 걷는 게 부담이 안될 줄 알았는데 9일차에 도착해서는 도저히 걷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 따라왔다.
5일차와 비슷하게 염증인가 싶어 한의원에서 침 맞으면 괜찮겠지 싶어 병원에 갔으나
상상도 못한 가자미근 파열 진단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근육이 파열되어 일반적으로는 한 달 동안 휴식을 취하라고 했을텐데 국토대장정은 끝내야되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봉침도 맞고 그냥 침도 맞고 부항 뜨고, 물리치료도 받고 ...
어떻게 걷는 지, 어디를 어떻게 마사지하면 좋은 지 자세히 알려주셔서 참 감사했다.
피드백?을 적극 수용하고 근육 테이핑도 하니 통증이 줄어들긴 해서 마저 그리고 계속 걸었다.
트럭에 스침
물리적 부상은 아니지만 심리적인 부상이랄까
10일차에 트럭에 스쳤다.
조금 떨어져서 스친 것도 아니고 내 옷을 치고 지나갔다.
내 몸 혹은 가방을 치고 간 게 아니라 다치진 않아 참 다행이였는데 무서웠다.
이후에 좁은 갓길로 걸을 때 손에 식은 땀이 나곤 했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걸으면서 따뜻했던 점
안좋고 힘든 일을 주절 주절 적어 봤지만 사실 좋은 일이 더 기억에 남는다.
풍경
차도를 가장 많이 걷긴 했지만, 해가 뜨고 있는 멋진 시골길, 탁 트인 강가, 눈이 쌓여 계절감이 풍부한 길 등
걸어야 볼 수 있는 좋은 풍경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낙동강과 밀양강 부근에는 자전거 도로가 잘 깔려 있어서 차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 편히 풍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었어서 기분이 좋았다.
걸으면서 좋았다고 생각한 풍경에는 사진을 찍곤 했는데 돌이켜보니 대부분 물가 사진이였다.
'내가 왜 물가를 좋아할까' 또한 생각해 보았는데
내 유년시절 9년간 살았던 집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흘렀는데 그 영향이 크지 않을까 생각 되었다.
응원해주는 사람들
내 개인적인 도전이자 여행에 공감하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지나가다 내 깃발을 보고 힘내라고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고,
식당에서 서비스를 주시는 사장님들,
걸으면서 먹으라고 빵을 주셨던 교회 집사님,
응원과 함께 기프티콘을 보내주셨던 지인들 그리고
각 지역마다 만나며 식사를 대접해 주셨던 지인들
참 고마운 사람이 많았다.
솔직히 포기하고 싶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답은 완주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근데 내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면 건강이 먼저라고 하실 분들이였기 때문에 아픈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아픈데도 이렇게 하고 있어요 !! 라고 티 내고 싶은 마음이 컷는데 좀 찌질해보일까 이제야 마음 편히 적어본다.
도착
그렇게 15일 동안 약 420km를 걸어서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에는 바다를 보면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올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벅차오르진 않았다.
그래도 표지판에 부산이 보였을 때, 광안리 해수욕장이 보였을 때는 엔돌핀이 솓구치는 느낌을 경험했는데, 일례로 마지막 2시간은 안쉬고 계속 걸었고 차만 없으면 뛰고 싶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원래는 도착해서 부산에서 며칠 놀다 갈려 했으나 동료가 떠난 대구 이후부터 혼자 숙박업소에서 자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허하다는 감정을 깊게 느껴 당일에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
출발 이후에 정한 국토대장정의 목적인 나와의 대화
는 많이 할 수 있었고
대화를 통해 알고자 했던 나
도 조금이나마 정리해 볼 수 있었고 정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성취감
나는 성취감과 성취감을 위한 과정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성취감에 대한 기대가 과정의 고통을 이긴다.
나는 여느 남자아이처럼 게임을 좋아하곤 했는데, 익히 CD 게임이라 말하는 콘솔 게임을 좋아했다.
그 게임에는 트로피라는 게임 외적으로 계정에 종속되는 보상 체계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위해 반복적이고 재미없는 시간을 수 없이 보냈었다.
그런 과정이 더욱 값지고 높은 효과?의 성취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였을까
지금은 게임을 하지 않고, 파워리프팅이라는 운동을 취미삼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성취감 때문이다.
처음 운동(웨이트)을 시작했을 때는 재활 운동이 목적이였고, 이후에는 일반적인 보디빌딩식 운동을 했었다. (물론 돼지이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다 어느날 성취감을 느끼는 보디빌딩식 운동도 재미가 있었지만, 우연히 접한 무거운 무게를 딱 하나 들어올리는 파워리프팅이란 장르는 더 강하고 즉각적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개발을, 그 중에서 클라이언트 개발을 하는 이유도 이 경험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나는 왜 개발하는가
내가 성취감을 좋아하는 것은 알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나한테 궁금한 점이 왜 개발자를 직업으로 삼을려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막연하게 아래처럼 생각해 왔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 그냥 계속 해왔던 거니까
-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제일 잘하는 거고, 내가 직업을 구하기 제일 쉬운 길이라 생각돼서
- 보수가 좋아서, 근무 환경이 좋은 편이라서
고민을 시작할 때 내가 왜 처음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는 지를 돌이켜 보았고 '제일 중요한 점을 잊고 있었구나'라고 생각되었다.
처음 시작한 게임 개발은 다른 사람을 재밌게 하기 위해, 무엇보다 내가 만드는 과정이 재밌었기 때문이였다.
개발은 과정에서 성취감이 즉각적으로 느껴져 내가 재미를 느끼고 좋아한다. 그래서 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이였다.
물론 막연하게 생각했던 점들도 아예 고려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해낸 원초적인 이유는 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멋
나는 항상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멋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내가 그리고 모두들 꺼려하는, 어려워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누군가 해야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먼저 자진해서, 성공적으로 해내고 별 일 아니였다는 듯이 대하는 사람,
남에게 도움이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런 과정에서 성취감 또한 느껴져 그런 사람의 가면을 쓰고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싫어하는 것
내가 좋아하고, 되고 싶은 사람 다음에 들었던 생각은 '내가 어떤 상황을 싫어하는가'였다.
높은 다리를 건널 때 이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싫어한다.
걱정이 많은 편이라 생각되고 (물론 걱정이 많아서 미리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 중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다.
실행력
이라는 말을 내 장점으로 언급하곤 했을만큼 빠르게 일을 해치우곤 했는데 이게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심리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되었고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근데 걱정이라는 것이 지금 당장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을텐데 나는 내가 지금 통제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내가 싫어하는 통제할 수 없는 걱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높은 다리에서 손에 땀을 쥐며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리고
이 외에 걸으면서 떠올랐던 생각, 나에 대한 질문이 많았고 이걸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되어 메모장에 적어 놓았는데
손이 시려워 그런지 너무 간단히 정리했던 것 같다.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을 기술하며 느끼고 배웠던 것을 마무리한다.
- 가끔은 쉬어 갈 필요도 있다.
- 회복을 위해
- 놓치는 광경과 순간을 위해
- 길이 위험하면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 자주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 도전하는 용기보다 포기하는 용기가 더 크다.
마치며
길 끝에 다다르면 인생이 바뀔만한 자신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흐르는 감정같은 금은보화를 얻을 줄 알았지만 막상 그런 것들은 부산에 없었다.
하지만 가는 길에서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응원을 받을 수 있었고,
나와 깊게 대화해보는 경험을 통해 나를 더 잘알 수 있게 되고,
하루하루 힘든 몸을 이겨내 도착했다는 감정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자신감 그리고 추억을 얻을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보는 분들이 만약 부산에 가고 싶은데 걸어갈까? 라고 생각한다면 비행기 혹은 KTX를 이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끝 없을 것만 같은 길을 걷고 싶고, 본인을 더 잘알고 싶다면 국토대장정은 할 만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걸으면서 하루 하루 적었던 날 것 그대로의 내용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Footnotes
-
국토대장정은 차도를 많이 걷는다. ↩